‘집단’은 언제나 두렵다. 사전을 찾아보면, ‘집단’이 붙은 단어들은 중립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의미를 띤 것이 대부분이다. 집단폭력, 이익집단, 집단행동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때리니 두려운 것이고, 여럿이 이익을 추구하니 더 나쁜 평가를 받는다. 집단행동도 마찬가지다. 집단주의적 사고가 강한 한국·일본 등의 사회에서 일사불란한 집단행동은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군국주의의 폐해를 경험한 두 나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군대’로 대표되는 집단주의적 사고는 역사에서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해왔다.

2016년 광화문 광장에는 ‘군대’와 다른 집단이 등장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민중이 직접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통해 광장에 모인 민중이다. 이들은 집단사고(思考)를 하고, 집단지성(知性)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무기력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집단’이 무너진 대한민국을 구원했다며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의 집단행동을 좇은 시민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피에르 레비가 개념화한 사이버 상에서의 ‘집단지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셈이다. 절대 권력에 눌려 미약했던 개인들이 사이버 상에서 의견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함으로써 ‘집단지성’을 보여준 것이다.

‘집단지성’은 민중에게는 희망이요, 권력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집단지성 덕분에 헌정사상 최초로 오만하고 부패한 정권을 민중의 손으로 쫓아낼 수 있었고, 겸손한 대통령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헌법정신 아래 전직 대통령이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기도 했다. ‘집단지성’으로서 최고의 역량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변질된 일부 집단지성은 다시 ‘집단’의 부정적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최근 우리 지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세월호 추모공원’ 문제가 대표적이다. 집단의 동력을 빌려 유권자를 바보로 만드는데 동원한다. 시장의 편향된 불통을 지적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견제는 접어둔 채 자극적인 언어를 앞세워 사실을 왜곡한다.

그 덕(?)에 ‘섬뜩함’을 상징하는 두개골 문양 깃발이 시내 곳곳에 펄럭인다. 심지어는 ‘화랑유원지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구호까지 나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구한테 뺏긴 적 없는, 지금도 여전히 시민의 휴식공간인데 말이다. 그것은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의 이름을 빌린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그 ‘집단 이기주의’에 철통권력까지 무릎 꿇게 했던 지성은 사라지고 왜곡으로 인한 상처와 갈등만 남는다.

집단지성은 개인지성과 달라야 한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집단지성이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면 열린 마음가짐에 기반한 원활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개방성과 자율성을 살려 집단이 편견에 경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집단지성의 본래 의미에 충실하는 길이다. 어렵게 열매를 맺은 집단지성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촛불을 들었던 심정으로 집단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왜곡과 무지에 점철된 ‘집단’은 언제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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