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아넘랜드의 원주민들은 하루 서너 시간밖에 노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의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쉬엄쉬엄 하는 짧은 노동조차 당분간 먹을 음식을 얻으면 바로 중단되고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 정도의 노동만으로 부족 사람들 모두 다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 있다니! 게다가 이것은 그다지 특수한 사례도 아니라고 한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우리의 상식과 너무도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대부분의 원시사회가 축제와 오락의 사회였으며, 비문명권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루 서너 시간만 노동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고되게 일하지 않는데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다 채워지는 사회. 한 인류학자는 이러한 원시사회야말로 “최초의 풍요로운 사회”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농경사회 또한 삶이 축제와 놀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농사일이 가장 바쁜 시기일수록 더 많은 축제들이 있었다. 노동 후에 놀이가, 놀이 후에 노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놀이가 노동 안에 있어 삶을 생기 있고 리드미컬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노동사회학자 보방은 1700년경만 해도 평민들이 일하는 날은 1년에 180일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180일이라구? 그렇다면 1년의 반 이상을 놀았다는 게 아닌가! 기록에 따르면 당시엔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이요, 월요일까지 ‘블루 먼데이’라고 부르며 일을 하지 않아서 일주일에 나흘만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한다. 그 나흘조차 온갖 축제와 종교 행사로 쉴 때가 많았고 일가친척의 생일까지 다 찾아 놀았다니. 180일 노동이라는 것도 좀 넉넉히 잡은 거라고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E.P 톰슨 또한 18세기까지 노동 생활은 “한바탕 일하고 한바탕 노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실컷 놀다가 내킬 때 일하기 시작했으며, 무수한 축제와 잦은 파티. 음주와 유희가 밤샘 작업과 어우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자.

이것은 그들이 게을렀다는 얘기가 아니다.

산업사회 이전의 노동자들은 노동하기 위해 살지 않았으며, 필요 이상으로 노동할 이유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들에게는 놀고 축제를 열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인생을 즐기는 것이 훨씬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만 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과거 문학은 노래였으며, 철학은 지혜를 겨루는 수수케끼였고, 과학은 마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합리’와 ‘객관’이라는 이름의 칼날이 마법을 과학에서 쫓아냈다. 세상 전체를 감싸는 기운을 이해하려던 마법과 연금술사 대신 시작된 건 차가운 실험,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분석하는 이 실험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자연을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 심지어 우리가 정복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제 학문은 얼마만큼 ‘쓸모’있는가를 평가받기 시작한다.

학문들 사이에 서열이 생기고 한편으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추려져서 목록이 작성된다. 이전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형제들과 다투면서 몸으로 익히던 사회적인 감각이 ‘도덕’이나 ‘국민윤리’라는 이름의 교과서로 만들어지고, 부엌과 일터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웠던 다채로운 삶의 기술들은 ‘가정’이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일괄 정리 되었다. 달달 외워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은 점점 길게 추가된다. 몸 전체로 호흡하며 익혀야 할 인생의 지혜들이 책상에 앉은 채 멍하니 들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공부는 시험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향한다. 이러니 공부가 지겨운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공부는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식자는 “게으름뱅이의 천국에 가면 정말로 행복할까? 의외로 금세 지루해지는 것은 아닐까? 장 자크 루소는 사람들이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노동은 지옥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이 지옥이 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게으름뱅이의 천국을 꿈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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