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LO’의 사전적 의미는 ‘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뜻의 약자다. 여기에는 한 번뿐인 인생에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흔히 ‘오늘을 즐기라’고 인용되는 라틴어의 ‘카르페디엠(Carpe Diem)’과 유사한 표현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꿈꿔오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풍조는 당연한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욜로족의 출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과거 10년간 자료를 분석해보니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꿈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노력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꿈이 사라진 곳에는 중산층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한 소시민들의 삶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정말 사다리는 사라지고 희망의 꿈은 더 이상 꿀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사진작가 최민식의 ‘나를 찍고 싶었어’라는 책은 우리에게 꿈을 주는 사다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던 가난한 소년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훗날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진을 찍게 되었다. 지치고 힘든 얼굴로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아이, 길바닥에서 잠든 지게꾼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 배고파 우는 아이의 모습 등. 이런 사진들은 우리네 고달픈 삶의 현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모습의 사진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힘을 낸다. 살 이유를 찾는다. 그것이 꿈이고 사다리라고 외친다.

영화 ‘시’에서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는가? 흘러간 세월을 되돌아 시에 집착하는 한 여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가 삶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흘러간 삶의 흔적을 붙잡고 시라는 작업을 통해 삶의 끈을 이어가고자 하는 가상한 노력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가 꿈의 사다리인 셈이다.

‘시가 흐르는 강’의 저자 젠 브라이언트는 평범한 것들에 대한 회상에서 꿈을 회복하는 세대를 얘기하고 있다. 자두, 외바퀴, 잡초, 소방차, 어린이들, 나무 등 길을 걷거나 창밖을 내다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에 대해서 글을 쓸 때 그는 꿈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황토 십리길 새벽이슬에서 만나는 능소화, 향나무 사이로 밀려오는 백합 향에서 우리 시대의 꿈을 곧추 세울 수 있었다.

‘꿈은 나쁜 게 아니다/시를 쓰고 싶다/아주 많은 것들이/믿고 의지하는’ 월리엄스의 시처럼 사람들은 증권이나 펀드가 아닌 그림에서, 사진에서, 시에서 꿈을 회복하는 기운을 얻는다. 때로는 우리와 같은 세대의 아픈 기억 속에서 기어 나와 꿈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와 같은 고달픈 삶을 사는 이들에게 예술과 문학은 상승의 사다리인 셈이다.

대학에서 무너지는 인문학이 노숙자들 속에서 혹은 영어의 몸인 교도소 안에서 작은 꿈을 키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사유에 빠지곤 한다. 그래 인문학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돈을 뛰어 넘어 사람이 사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대학에서 죽어가고, 현실에서는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깨닫지 못한다. 당장 눈앞에 놓인 꿈만 바라보다보면 멀리 볼 수 있는 꿈이 사라진다는 것을.

언론 보도만 바라보면 슬프고 외롭다. 사람 사는 재미도 없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면 기쁘고 감사할 일이 많다.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꿈을 꾸는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사물에 매달려 헛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유효한 세상을 향해 웃음을 던지는 것이다.

꿈을 꾸는 행위는 나쁜 게 아니다.

즐거운 일이다. 아주 즐거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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