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에는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쉽게 말해 ‘나의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고 보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산시가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오전 11시, 안산시 중앙역에서 또 자살사고가 발생했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지하철 자살사고는 ‘교통사고’와는 다르게 사고의 목격자가 훨씬 더 심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고를 속수무책으로 목격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결국 목격자는 ‘목격자’에서 강제적 ‘피해자’가 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즉, ‘사고의 목격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자’가 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안산시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산시는 아무런 역할 수행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중앙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수 있는 소관 기관은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이다. 그러나 일반시민이 중앙역의 시설관리 책임 소관은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저 안산시에서 일어난 사고이며, 스크린도어 미설치로 인해 반복되는 사고이기에 안산시청이 해결 할 수 있는 사고라고 인식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인식인 듯하다.

실제로 안산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시장에 바란다.’라는 페이지에는 중앙역의 스크린도어 설치에 대한 민원이 상당히 많이 등록되어있다. 즉, 안산시민들은 반복되는 지하철 자살사고에 대해 안산시가 주도적으로 ‘해결사’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방증인 것이다.

그러나 안산시는 그저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에 ‘협조공문’을 보내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협조공문’세례에 힘입어 ‘올해 말까지 안산시 관내의 스크린도어 설치를 마무리한다.’라는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의 답변을 얻어냈지만,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동안 자살사고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자살을 하는 사람도 ‘안산시민’이고, 자살사고의 목격으로 인한 피해자도 ‘안산시민’이며, 자살사고로 인한 전동차 운행지연으로 인한 피해자도 ‘안산시민’이다. 즉, 중앙역의 관리 감독책임은 안산시에 없을지 몰라도, ‘안산시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책임은 여전히 안산시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산시는 ‘안산시민’이 반복적인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해결사’가 아닌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다.

반복되는 사고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방관자’다.

필자는 이제 안산시가 ‘얼마나 더 많은 시민들이 피해자가 되어야만 해결책을 모색할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능동적으로 무엇 하나라도 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개개인만이 아닌 기관도 방관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학교폭력에 대해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방관자는 제2의 가해자라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을 토론의 주제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관자를 ‘제2의 가해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인들은 학생들에게 ‘방관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까지 안산시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제2의 가해자인가?’방관자와 제2의 가해자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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