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최용신 선생 순국 82주기가 되는 해이다.

안산신도시 초기에는 각지에서 새삶을 찾아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최용신은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해 먹고 사는 일이 중요했던 시절 상록수 정신은 차츰 안산시의 발전과 비전을 같이 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그 중심에는 브나로드 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Vnarod 운동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농촌계몽운동을 일컫는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인 브나로드는 러시아의 농민 자치공동체((Mir)를 기초로 지식인들이 민중계몽을 위해 농촌에서 벌인 문화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은 많은 지식인들이 검거되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이 영향을 받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사에서 농촌계몽을 전개하였다.

최용신, 채영신, 심훈, 박동혁, 유달영, 김교신, 황에스더, 김학준, 길금복, 천곡교회, 장명덕, 심재영 이 모든 이들은 최용신과 관련된 실제 인물이거나 혹은 소설 속 인물들이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가족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려 어릴적부터 신앙 생활을 했으며, 감리교단이 설립한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협성신학교에서 황애덕(에스더)를 만나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교수이기도 했다.

1931년 당시 수원지방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WCA의 지원으로 경기도 반월군 천곡(샘골)에 파송을 받았을 때 천곡은 교회를 중심으로 선임자인 장명덕 전도사에 의해 학원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최용신은 밀러 선교사가 기증한 전재풍 목사의 사택 건너방에 임시 거주하다 교회 뒤 4칸 초가로 이사해 장명덕 전도사와 함게 거주하며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많을 때는 110명의 학생들이 북적이던 천곡학원에서 그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강행군 속에 특히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과목은 특히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이었기에 일제는 시설미비를 들어 학생들을 감축하는 등 분열정책과 조선의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트집을 잡았다.

1934년 좀 더 신학적인 공부를 위해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이면에는 자신의 오빠와 동생 그리고 약혼자인 김학준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간의 고된 농촌사업에 지친 그는 병을 얻어 귀국, 그해 장중첩중으로 수술, 병세 악화로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000여 명이 참석한 사회장과 신문기사는 심훈이 상록수라는 소설을 쓰는 중요한 제재가 됐다.

최용신의 삶과 농촌 운동을 펼쳤던 장조카 심재영의 삶이 실제 모델이 된 상록수는 책으로 출판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정도선에서 최용신을 안다.

그러나 좀더 들어가보면 원산 출신으로 10대에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 김학준이 있다.

그는 방황의 과정을 거쳐 길금복을 만나고 샘골학원의 이사장으로 학원일을 도왔다. 그는 사후에 최용신 옆에 묻히는 순애보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신간회 수원 지부 간부로 활동했던 정미소 주인 염석주의 기부와 반월면 부호 박용덕의 땅 기증, 언니의 뒤를 이은 여동생 최용경의 교사 활동, 장명덕 전도사의 학원 활동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홀로 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영향과 협력 없이 혼자 이루어지는 법이 결코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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