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우리고장 문화유산 이야기(30)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48번지 큰말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에서는 일명 애기능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보통은 명안공주 능이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오태주[吳泰周 1668년(현종 9)~1716년(숙종 42)]와 그의 부인 명안공주[明安公主, 1665년(현종 6)~1687년(숙종 13)]를 모신 합장묘의 유택이다.

오태주는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형조판서(刑曹判書) 두인(斗寅)의 3남이며, 어머니는 상주 황씨이다.

1679년(숙종 5) 현종의 셋째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이어 광덕대부(光德大夫)에 올랐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 조지서(造紙署)와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임금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송시열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다가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왕명에 의하여 직첩이 환급되었다.

4세 때 벽 위에 장지를 보고 그것이 어필(御筆)임을 알고 무릎을 꿇고 절을 했을 만큼 어려서부터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에 능했다.

숙종 38년(1712) 청나라 사신이 국왕과 대신의 시가 담긴 병풍을 원하자 그것을 서사(書寫)하였고, 왕실의 재궁(梓宮) · 옥책(玉冊) · 신판(神板) · 유지(幽誌) 등을 많이 썼다.

그는 사람됨이 영민하고 밝으며 강직했다.

일찍이 향약(鄕約)을 만들어 곡식 수백 곡(斛)을 염출하여 이를 때에 맞춰 사고 팔아

제활(濟活)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부인 명안공주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동생인 진주(晋周)의 아들 원(瑗)을 입양하였다.

전해 오는 묵적으로는 행서체로 쓴 간찰이 다소 있으며, 금석문으로는 ‘오두인비(吳斗寅碑)’등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명안공주는 현종의 셋째딸로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딸이다.

숙종의 누이이며, 7세에 ‘명안(明安)’이란 작위에 봉해졌고, 1679년(숙종 5)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했다.

타고난 성품이 정숙하고 아름다웠으며, 지조는 정정하고 그 덕은 온순, 공손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받들자 위 아래 모두가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나 병으로 23세에 일찍 죽자 숙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賻儀)와 장수(葬需)를 보내고 관사(官司)에 명하여 제물을 준비토록 하여 의례를 갖추어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명안공주의 유품은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 문중에 전세되어 오다가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입수 · 관리하고 있는데, 1995년 45점의 유물들이 보물 제1220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명안공주와 함께 그 시어머니인 상주 황씨, 남편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 그리고 아들인 오원(吳瑗)의 묘가 열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다.

묘역은 서남쪽에서 동북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구릉의 끝 부분 능선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능선의 자락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에서 동북편 약 50m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 남아 있었다.

이 재실은 1997년 6월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다.

오태주와 명안공주 묘는 단분(單墳) 부부합장묘로 봉분의 직경이 800cm이고 높이는 155cm이다. 묘의 아랫단에 상석과의 사이에 1단의 지대석을 심어 두었다.

묘를 향하여 우측에 묘비가 있고 좌측에는 숙종이 지은 제문비가 있다.

중심에는 상석이 네 귀에 북 모양의 받침을 하고 놓여 있고 그 전면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과 비슷한 위치에 묘의 양측으로 문인석이 하나씩 서 있다. 장명등과 문인석, 망주석은 장식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명안공주의 묘갈은 1688년(숙종 14)에 세워졌으며, 1720년(숙종 46)에 새긴 오태주 묘갈의 비문은 김창흡(金昌翕)이 찬(撰)했다. 묘비는 사각인데 사면에 해태를 조각하고 있고 전면과 후면에는 해태 두 마리가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측면에는 한 마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인동초로 장식하였다.

비개석은 사각 맞배지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별다른 장식 없이 지붕 모양만 만들었다.

숙종어제제문비는 숙종이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과 오태주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으로, 크기가 110×49×19cm이며 기대석은 88×57×30cm

이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원두로 개석이 없는데 방석기단 위에 있다. 대리석이어서 마모가 심하여 일부의 글씨는 읽을 수가 없는데 그 내용은 대략 명안공주가 명성왕후의 셋째로 뒤의 두 누이들이 모두 일찍 죽어서 슬프다는 내용이며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것이다.

오태주의 제문에도 그의 재주를 기리고 일찍 죽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2003년 4월 21일 경기도기념물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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