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귀

남의 소리를 잘 들으면 당나귀처럼 귀가 크다고 한다.

남의 소리를 너무 들어도 줏대 없다 그러고 너무 안 들으면 불통이라 그런다.

그러면 어느 정도를 들어야 되는 지 참 가늠하기 힘들다.

이솝우화에 부자와 당나귀 이야기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기위해 가는 여정을 웃음과 동시에 그 누구의 비위를 맞추기도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젊은 여성들은 왜 당나귀는 편하게 걷게 하고 힘들게 걸어가는지 어리석다고 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 등에 태우고 간다.

그러고 멀리 못가 노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노인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번엔 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 아들은 걷는다.

또 이렇게 얼마를 못가 아이를 품에 안은 부인네를 만나게 되는데 이번엔 어째 아들이 저렇게 지쳐 보이는데도 당신은 당나귀를 타고 당당하게 갈 수가 있느냐고 하자 이번엔 아들도 같이 당나귀를 타고 가다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젊은이들은 고생하는 당나귀를 그 누구도 당신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하자 이번엔 밧줄로 당나귀 다리를 묶은 다음 장대에 걸고 가자 만나는 이마다 웃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 다리 위를 지나는데 당나귀가 발버둥을 치다 다리 아래로 떨어져 당나귀는 죽고 만다.

늙은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다가는 어느 누구의 비위도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한편의 이야기이지만 어찌 보면 큰 당나귀 귀가 남의 이야기를 너무 잘 듣는 경우를 빗대어 당나귀 귀를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살아가다보면 남의 예기를 듣지 않아 낭패를 경우도 참 많다.

가정에서도 알게 모르게 가족의 예기를 무시하는 가정도 참 많은 것 같다.

왜 남의 예기를 듣지 않는지는 세월이 지나서 스스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끝내 모르는 경우도 많다.

부자지간에 이런 불 소통으로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를 무시하고 아버지도 성인이 된 아들을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극도로 대립되거나 끝내 집을 나가는 아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의견을 듣고 꼭 그 의견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어주고 관심을 가지고 보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관심 있게 들어는 주는데 뜻한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불평을 갖는 사람도 있지만 관심 가져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는 사람이 있다.

서로 각자의 차이가 있겠지만 정답을 정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일단 만나다 보면 내용을 알게 되고 그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는 그 때부터 시작이다.

위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가는 곳 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마는 매번 그 말대로 했다는 거에 부자의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아버지의 노력이 돋보인다.

누가 뭐라던 자기 생각대로만 하다간 요즘 세상은 아무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조금 우스꽝스럽더라도 이렇게 부자가 펼치는 예기는 현실정치에 정치인이 좀 배우면 싶기도 하다.

뽑을 땐 우리 손으로 뽑는데 뽑히고 나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정치인은 이런 얘기에 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좀 억울한 일도 좀 풀어지고 한다. 아예 안 된다는 접근 방법으론 될 수 있는 일이 없다. 누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부여하고 함께 한다는 생각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생각이다.

어떠한 얘기도 들어 주는 귀를 가진 정치인이 참 그리운 때다.

들어주다 보면 아닌 것도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논쟁하지 말고 같이 풀어가려는 노력이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다.

선거에서도 당선을 위해 싸울 때는 경쟁이지만 당선이 되고 나면 그 2% 차이를 따지지 말고 함께 전체를 보고 갈 수 있는 역할이 참 중요한 것 같다.

당이 다르다하여 선출직 공무원이 자기캠프에 했던 사람만이 소통한다면 그 결과는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소의 가치 차이는 있더라도 함께하는 가치의 공유를 이제는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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