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응인(韓應寅) 영정(影幀) 및 유물(遺物)

한응인 영정 및 유물은 안산시 상록구 충정공길 59(사사동 새말)의 청주한씨 충정공파 재실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활약한 한응인[1554(명종 9)~1614(광해군 6)] 선생의 초상화 1폭과 초상화를 모셔 두었던 사당 안에 남아 있는 9점의 목제 제사도구들이다.

한응인은 초서(草書) 등 글씨에 뛰어났으며, 네 차례나 명나라를 오가며 조선과의 화합을 이끌어 내었다.

선조의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선조유교칠신(宣祖遺敎七臣)’의 한사람으로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 유촌(柳村), 본관은 청주(淸州),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예조판서·우찬성·우의정에 오르고, 평난공신(平難功臣)을 비롯해 네 차례나 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사후인 인조반정 후에 회복되었다

비단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91.5cmx164cm 크기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의 작품이다.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두 손을 관복 속에 결한 단정한 모습을 보인다.

사모가 높고, 흉배는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에 금채(金彩)를 가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며, 각대는 1품 이상만 두르는 서대(犀帶)를 갖추고 있어 문관 종1품인 우찬성때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살아있는 듯이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은 훈염법(움폭한 곳은 붓질을 거듭하여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덜 하여 밝은 느낌을 주는 그림 기법)을 사용하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그림형식으로, 전형적인 공신도형식을 따르고 있다.

초상화를 봉안하였던 사당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9점의 목제흑칠제구(木製黑漆祭具)가 남아 있는데, 교의(交椅, 죽은 이의 위패를 모셔두는 의자처럼생긴 도구) 2점, 주독(主櫝, 죽은 이의 위패를 넣어두는 궤) 1점, 신주(神主, 죽은 이의 위패)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사상(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부어 두고,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 두는 상) 2점이 남아 있다.

이들은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목제도구 연구에 기준이 될만한 소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한응인 영정과 유물은 1995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내고장 안산』(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1990)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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