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계절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구르몽이나 “여름은 참으로 위대 했습니다”로 시작하는 릴케의 유명시 귀절을 절로 읍조리게 하는 사색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지구 온난화와 슈퍼 엘리뇨 현상으로 1880년 근대적 기상관측이래 세계는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고 우리나라도 한달이 넘게 열대야 현상이 지속 되었다. 가끔은 신분을 잊고 이맘때 쯤이면 가수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절로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된다. 배호의 ‘마지막 입새’와 함께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가을만 되면 온동네 전파사 오디오를 통해서 어지간히 많이 들었건만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유는 노래의 가사 내용 깊숙이 인간 내면을 울리는 서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반짝 떳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젊은이들 노래 하고는 차원이 다른데 원인은 인간 심연을 건드리는 가사 편곡의 접근성 방법에 있는 것 같다.

낙엽은 한편에서는 길거리를 어지럽히고 미화원 아저씨들의 고단함을 가중시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눈부신 푸르름을 자랑하던 싱싱한 나뭇닢들이 검스럽게 변색된채 거추장 거리가 되어 거름이 되거나 불태워 짐을 볼 때 가슴 깊숙히서 절로 허무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인생도 실로 낙엽의 여정과 비슷한 것일까? 청년시절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뜨거운 활력과 용솟음 치던 기개들은 어느덧 간데 없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늘어만 가는 흰세치의 머리숱과 미간의 잔주름을 발견 할때면 시간의 덧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고뇌의 계절이다.

생이란 무덤 속에 들어간 시신이 흙으로 동화되고 거름이 되어짐으로 진정 낙엽과 같은 수순으로 끝맺음 나는 것은 아니며, 그저 후손을 낳고 기르고 종래는 그들의 자양분이 되고 마는 삶이 끝이 아니다. 개개인에 대한 일생을 통한 위대한 가치와 목적이 숙명적으로 주어져 있고 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연출자가 되시며 세상은 무대요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한편의 단막극 배우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뭇닢은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종결로 귀착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인간은 반드시 내세가 주어지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갈림의 삶으로 나누이며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심판이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낙엽이나 여타 동물하고는 근본적으로 삶에 주어진 존재의 목적과 가치가 태생적으로 구별되어져 있다. 하지만 많은 군상들이 탐욕과 죄로 인하여 안목이 흐려져서 단 한번 주어진 고귀한 인생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채, 하나님의 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또한 자각의 노력도 하지 아니하며 배부르면 만족하는 금수 아류들 마냥, 말초적 만족을 위해 다람쥐 채바퀴 돌듯 하루하루 살다가 쓸슬하게 떨어지고 마는 애처로움의 길을 걷고 있다.

피조물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조물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기에는 금방 한계의 벽에 부딛친다. 하지만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태동되기 시작하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많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지난 시절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 저기서 용돈으로 쓰라며 기억원씩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가 정권이 바뀐 후 순식간에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가는 애처연함을 목도하고 느낀적이 있다. 잠시뿐인 한시적인 권력에게도 많은 특혜가 부여 되거늘 영원한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가 막힌 특권을 받고, 누릴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음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에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다.

물고기에게는 물속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지만 그러나 물밖의 삶은 오히려 광대 무한한 이치처럼 내세의 세계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가질지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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