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열대야 속에 힘든 여름을 보냈다. 정신이 몽롱하고 잠 못 드는 날이 유난히 많았던 여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머리를 맴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더니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부는 쌀쌀한 바람에 벌써 춥다는 소리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색다른 피서를 통해 폭염을 이길 생각을 했음직도 한데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게 틀림없다.

다산은 57세에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더위가 심하자 더위를 극복할 방법 8가지를 소개했다. 소서팔사(小暑八事)가 바로 그것으로 송단호시(松檀弧矢), 괴음추천(槐陰鞦遷), 허각투호(虛閣投壺), 청점혁기(淸簟奕棋), 서지상하(西池賞荷), 동림청선(東林廳蟬), 우일사운(雨日射韻), 월야탁족(月夜濯足)이다.

송단호시(松檀弧矢)란 여름 무더위에 밤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나무 둑에서 활쏘기를 즐긴다는 피서법이다. 한여름 밤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무더위에 땀 흘리는 운동만큼 좋은 피서는 없다는 사실을 옛 선비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음추천(槐陰鞦遷)은 홰나무에 그네를 매어놓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잊는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네를 탈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지만 시원하게 달리기를 하거나 더위를 피하기보다 바람으로 맞서 상생하는 피서법에 호응이 간다. 허각투호(虛閣投壺)는 시원한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청량한 강변에 위치한 누각에서 친구들과 투호놀이를 하며 웃고 즐기다보면 어느덧 무더위도 잊는다는 피서법이다. 얼마 전 설악산 주전골을 걸으며 무더위를 식힌 적이 있는데 물소리 바람소리만큼 좋은 피서법은 없는 것 같다. 청점혁기(淸簟奕棋)란 이도 저도 싫증이 나고 하기도 싫을 때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수박 내기 바둑을 두면서 더위를 잊는다는 피서법이다. 컴퓨터 게임으로 진화한 젊은 세대들의 놀기법이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같은 내기라도 옛것은 운치가 있어 좋다. 서지상하(西池賞荷)는 여름이면 만발한 연꽃을 보며 뒷짐 지고 걸어 다니며 더위를 잊는 피서법이다. 얼마 전 폭염에 연꽃 보러갔다 질겁을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뙤약볕에 연꽃 보며 피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선배들은 이런 더위를 즐기며 삶의 기쁨으로 승화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 동림청선(東林廳蟬)은 동쪽 숲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더위를 이기는 피서법이다. 요즘 가을로 들면서 매미 소리가 점점 청량하게 들린다. 바람 따라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그래서 시원하다. 참으로 좋은 피서법임에 틀림없다. 우일사운(雨日射韻) 피서법은 비오는 날이면 시를 지으며 더위를 잊는 것이다. 실로 운치가 있지 않은가. 천수 정도의 시를 지으며 무더위를 난다는 발상이 대단하지 않은가. 학업에 치워 문학을 멀리하는 요즘 세대에 시를 짓는 행위나 이를 통해 무더위를 이긴다는 발상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피서법이 월야탁족(月夜濯足)으로 달밤에 물가에서 발을 씻는 것이다. 달밤에 물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으면 어떨까? 물론 시원함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유래 없는 폭염과 열대야를 보내며 뒤늦게 선배들 피서법 운운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 가만은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발악하듯 버티는 방법과 묵묵히 지혜롭게 즐기는 법이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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