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자 남도판소리 원장

“이런 거(인터뷰) 안 해주셔도 되는데…. 정말 하는 게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역시 쉽지 않았다. ‘누구도 천사가 될 수 있다는 취지’라는 설명을 하고서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애자 남도판소리 원장(사진)은 현재 호남향우회관에서 판소리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소리교실은 평생 소리꾼으로만 살아온 그의 재능기부 활동이다.

“해외 활동을 하다 한국에 들어와서 아주머니들이랑 어울리며 놀던 게 나눔 활동이 됐습니다. 재 재능을 남에게 알려주는 게 재밌어서 시작한 일이 하나둘 입소문을 타다 보니 조촐하게나마 소리교실을 열게 됐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전통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시절에는 고전무용을 하다 성인이 돼서 판소리로 진로를 변경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가 해외로 나라의 이미지를 홍보하던 시절,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선전하러 세계만방을 누볐다.

“70년대부터 여러 나라로 우리나라를 알리며 다녔어요. 유럽부터 아프리카, 남미까지 정말 안 가본 데가 없었어요.”

나라의 얼굴로서 여러 나라를 돌며 조국을 홍보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끊겼다. 더 이상 조국이 부르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 내려가 객지 생활을 했다.

“일본에 내려가 일본 민간단원 쪽에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하루이틀이 지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됐지만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결국 2010년도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됐어요.”

한국에 들어와서 학원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얼마 못 갔다. 이름도 알려지고 국가의 해택으로 외국도 많이 다녀왔다. 나라의 은혜를 받은 만큼 이젠 국가에 돌려주고 싶었다. 돈을 쫒는 일은 그만 하고 싶었다. 향우회에서 소리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무료로 재능기부를 했다.

소리봉사로 시작된 그의 나눔은 점점 파이가 커졌다. 요양원 어르신 돌봄 봉사, 무료 국수 봉사. 이젠 소리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 내민 손길 하나, 흘린 땀 한 방울 모두가 그의 재능이 됐다. 무엇보다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공연이 없는 날은 절대 봉사를 거르지 않아요. 몸은 좀 고단할 때도 있지만 남을 위해 내 소중한 땀 한 방울 나눌 수 있다는 게 무척 뿌듯합니다,”

특히 그가 몸담은 무료국수봉사는 반응이 뜨겁다. 봉사가 열리는 매주 금요일이면 국수봉사촌으로 약 150여 명의 어르신들이 국수를 드시러 오신다.

“회원들이 자비로 모은 회비로 국수봉사촌이 운영돼요. 벌써 4년 정도 이어온 봉사입니다. 100여 명이 먹을 국수를 삶으려면 손이 많이 가 힘들 때도 있지만 맛있게 드시고 가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이 마냥 좋아 매주 저를 이곳으로 이끌고 있어요. 앞으로도 건강만 허락한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약 37년 간 이웃을 섬겨 오면서 갖게 된 봉사 지론이 있다. ‘봉사란, 내 마음이 하는 것’이라는 거다.

“어떤 봉사라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해선 안 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꾸준히, 오래 할 수 있거든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즐겁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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