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스님 칼럼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 만행(萬行)이란 것이 있다. 한곳에 모여 수행하는 ‘안거(安居)’를 마치고 전국 산을 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이다. 원래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계급 승려들이 수행하던 것이다. 탁닛한 스님은 “걷는 것 자체가 이미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길을 떠남은 허공을 걷는 것과 같다. 우리의 길에는 상처가 있다. 상처를 하나씩 밟고 가야 한다. 회색빛 도시를 떠나 홀로 앞에 높인 길과 산을 향하는 마음은 정처 없다.

선각자들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짓지 말라고 한다. 튼튼하고 변치 않는 기반 위에 누각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만권의 책과 만개의 생각을 도모한 다음에 업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은 연약하고 어리석어서 중심을 잡지 못해 바람처럼 휩쓸린다.

세상 근본에는 음양(陰陽)이 존재하듯이 천지만물은 이분법의 양면을 가진다. 차면 더운 것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다. 인간의 종교에는 선악의 구별이 있다. 종교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마음 깊숙이 숨어있는 내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몹시 힘들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종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말하자면 살면서 힘들 때 복 받고 죽어서는 다음 생에서 영생복락을 얻는 길이 주어지는 셈이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가 전승한 신화들은 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유일신인 기독교와 천주교, 이슬람교, 무신론의 불교 등 종교들은 인간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신과 인간의 도덕률을 강조해왔다. 종교가 말하는 선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애당초 종교들은 성(聖)속(俗)과 선악 등 이항 대립적 사고를 주입해 왔다.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며 모든 종교의 신들 앞에서 사람은 똑같이 소중한 존재다. 그 고귀한 생명을 보호하고 법을 지키는 것이 선이고, 생명을 파괴하고 법을 어기면 악이다. 여기서 법이란 이를 테면 종교적 도덕률이다. 살생의 업보는 인과응보에 의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선과 악의 얼굴>의 저자 스티븐 배철러는 ‘악이 선의 반대개념이 아니며 악마란 뜻의 인도어 ’마라(Mara)‘는 선과 동일하게 나타났다’고 했다. ‘마라’ 늘 우리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걷잡을 수 없는 번뇌에 빠뜨리는 요인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있을 수 없다. 선과 악이 존재하려면 어김없이 상대편이 필요한 모양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극락)은 따뜻한 곳이다. 한편 악마의 심장부로 상징되는 지옥은 차가운 얼음 땅이다. 승려 샨티데바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으면 그 곳으로 돌진해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극락과 지옥은 서로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지옥을 보기도 하고 천당에 가기도 한다. 인간의 갈구함과 느낌은 순전히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보아도 양극단은 심각한 문제다. 한가지로 치달으면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제 울타리에 도리어 갇혀버린다. 그러면 더 이상 화합은 불가능하다.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된 생각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지금은 통합적 견지의 시각이 필요한 시대다. 우리는 사상의 경계를 넘어선 무(無)사상을 생각해야만 한다.

종교에서 많이 하는 말이 마음과 성품이다. 두 단어를 합치면 ‘심성(心性)’이 된다. 심성은 변치 않는 참된 인간의 마음이다. 모든 종교는 결국 맑은 심성과 자비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삶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덕을 베푸는 일이다. 종교가 없어도 덕을 쌓는 사람이 극락 간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맑은 심성은 자연의 기(氣)를 듬뿍 받아야 생긴다. 그렇기에 시간이 나면 산과 바다에 가야 한다. 이번 주말엔 가까운 구봉이산에서 에너지를 충전 받아보면 어떨까.

대부도 만블라선원 010-3676-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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