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은 올해로 시 승격 30주년이 되는 해 이고, 다 잘 알다시피 두 구청이 있다. 단원구와 상록구 이다. 산업화와 더불어 인구가 증가 하면서 시로 승격되고 분구가 되면서 구청 이름을 어느 분이 명명 했는지, 공모를 해서 지었는지, 아니면 시청 공무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석상에서 붙여졌는지, 안산 시민으로써 부끄럽지만 아직 모른다.

상록구는 농촌계몽 운동을 한 최용신을 모델로 삼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따왔다는 정도와 단원구는 천재 화가 김홍도의 호에서 따왔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안산 시내를 다니다 보면 역 지하도 벽면이나 심지어 청소차 등에도 김홍도의 풍속화 그림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

단원 김홍도 하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일반인들이나 어린 학생들은 그저 서당도나 씨름도를 그린 풍속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모든 방면에 뛰어난 조선 최고의 화가였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안산은 학문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찬 곳 이었다.

현재의 일동에는 실학의 거목인 성호 이익 선생이 있었고, 부곡동 에는 시서화의 삼절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 선생이 있었다. 김홍도는 7~8세부터 20세 까지 이곳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 선생 에게 그림과 글을 배웠으며, 그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 소질을 보였던 단원 김홍도는 나중에 어진화가로 이름을 드높이고,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도,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김홍도의 산수화 배경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남종화풍의 운치를 바탕으로 산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우리 산수 풍속의 서정을 잘 표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44세 되던 해 정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에 있는 4개 군의 풍경을 그린 것을 계기로 그의 독자적인 산수화를 확립한다.

이때 김홍도가 실제 경관을 그린 것이 ‘금강산 사군첩’ 인데 여기에서 우리나라 화강암 돌산과 소나무가 있는 토산을 표현하는 묘사법을 터득하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모습을 경쾌하게 묘사한 ‘수지법’이 완성 되었다고 한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하게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 있는 구도법과 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 있는 운염법 등으로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화와 남종 문인화가 만나는 수준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김홍도가 이룩한 풍속화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제 김득신, 혜원 신윤복 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단원의 후배 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 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 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 되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정승 벼슬과도 바꾸지 않는 다는 ‘삼공 불환도’ 와 ‘군선도’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가 가득 찬 우리가 잘 아는 25첩의 ‘풍속화첩’ 안산역 인지 중앙역 인지 지하도를 지나다 보면 벽면에 있는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 청앵도’ 그리고 단원 미술관에 가면 얼마 전 ‘화조도’가 들어오기 전 까지 유일하게 단원 미술관의 자존심을 지켜준 진작 ‘사슴과 동자’가 있고, 표암 강세황이 70세 단원 김홍도가 38세 때 스승과 제자의 합작품 ‘송호도’가 있다.

송호도 속 호랑이의 묘사력이 너무나 생동감이 있어 그 누가 시를 한 수 남겼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한 호랑이를 그리는데, 너무나 비슷하여 실물과 똑같네, .......

표암과 단원 일세,..... 또 누가 있어 이 두 사람을 계승 할고.

낙락장송 소나무 아래로는 오뉴월 마파람이 일어날 듯하고.....

채색이 살아나니 더욱 그럴 듯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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