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일이다. 안산에는 예술인 아파트를 비롯해서 몇몇 아파트가 있었고, 노적봉 옆으로 성포동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때만해도 노적봉을 가사미산이라 불렀고, 지금 변화가로 변한 고잔동은 넓은 논이었다. 나는 성포동 10단지 아파트에 입주한 이후,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랐다. 그러다보니 성포동은 잊을 수 없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안산 천에서는 강태공들이 낚시를 즐기고, 협괘열차가 지금의 시화공단과 반월공단이 위치한 너른 들판을 왕래할 때, 오이도에 가서 조개를 줍고, 협괘열차를 타고 소래 포구에 가서는 망둥이를 잡고, 사리포구에 바람을 쏘이러 가곤 했다. 비록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낭만이 있고, 정겨움이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노적봉에는 노송이 우거진 곳에 산자락 아래에 낡은 집이 한 채 있었고, 노송 옆으로 난 작은 길 가에는 커다랗고 잘생긴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는 오래전에 고사한 음나무였다. 그 음나무 아래서 드라마 촬영을 하곤 했었다. 언젠가 드라마 촬영을 할 때의 일이었다. ‘전설의 고향’ 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 탤런트가 등장을 하고, 비가 오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소방차가 동원되어 소방호수로 음나무 위로 물을 퍼부었다. 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그 곁에서 드라마 촬영하는 것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예술인 아파트에는 정지영 영화감독을 비롯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신우철감독이 살았고, 3단지 주공아파트에는 중견작가 윤후명씨를 비롯해서 많은 예술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에술인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노적봉에서 드라마를 비롯해서 영화촬영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커서 초등학교에 입할 할 무렵이었다. 퇴근을 하면 아이들과 함께 노적봉에 올라가서 산책을 하고, 바람이 살살 부는 날에는 정상에서 연을 날리곤 했다. 노적봉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지막한 산이지만 많은 이들이 찾았다. 비록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빠르게 흐른다. 노적봉에서 아이들과 뛰놀던 일들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 손을 잡고 노적봉을 오르던 아이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신출내기 교사로 부임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는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성포동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성포동이 그립고, 노적봉이 그립고, 그 무렵 낚시를 즐기던 강태공들의 모습이 그립다. 내가 지금 이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먼 훗날, 나는 또다시 지금의 안산을 그리워하고, 노적봉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 먼 훗날, 나와 우리의 아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 마음속에 노적봉과 협괘열차와 오이도와 사리포구와 강태공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은 안산을 그리워 할 때 무엇이 머릿속에 떠오를까?

내가 지금 노적봉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안산을 무척이나 그리운 고장으로 머릿속에 떠올렸으면 좋겠다. 한 때 많은 예술인들이 살면서 안산에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또 다시 많은 예술인들이 안산을 찾고, 그래서 안산에 품격 있는 문화의 거리가 조성이 되고, 안산을 배경으로 한 많은 문학작품이 나오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안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노적봉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그런 고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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