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먼저 일어난 아내가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이 화들짝 깼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오다니. 우리 식구들은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계량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계량기가 바람이 몰아치는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까닭에 겨울철이면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큰 맘 먹고 남들처럼 계량기에 보온 장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파트에 입주한지 처음 하는 일이다. 보온 장치래야 헌 옷가지를 계량기 틈에 구겨 넣고 겉에다 두꺼운 널빤지를 대고 그 위에 테이프를 붙이면 그만인데 그것을 하지 않아 해마다 고생을 한 것이다. 나는 헌 옷을 골라 계량기 안에 채우고 널빤지를 대고는 테이프로 겉을 덕지덕지 붙였다. 커다란 테이프 하나로 부족하여 집에 있는 온갖 테이프를 다 동원하여 아주 튼튼하게 보온 장치를 해 놓았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대단한 일이었다. 그 후 집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왕이면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길 바랐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도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러다 드디어 며칠 전부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혹독한 추위가 몰아쳤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했다. 집을 나서면서 한 번 들여다보고 들어오면서 또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올 겨울은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우리 집 바로 아래 계단을 보니 아래층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계량기에 전혀 보온 장치를 해 놓지 않은 것이다. 보온 장치는커녕 계량기 뚜껑이 열려 덜렁거렸다. 나는 집엘 들어서면서 '한심한 사람들이군'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아내가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아랫집에 사는 사람들 말이야,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계량기도 안 싸 놓고 저 사람들 정신나간 것 아니야! 저렇게 게으른 사람들은 계량기가 팍 터져서 고생을 해야 돼" 그렇게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집의 계량기가 멀쩡하면 열심히 준비한 내가 꼭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집의 계량기가 얼어붙다니. 자다가 벌떡 일어나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고는 수도꼭지를 틀어 보니 아내의 말대로 정말 수돗물이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튼튼하게 보온장치를 해놓았는데 수돗물이 나오질 않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아야 하니 얼어붙은 계량기를 녹이든지 관리소에 연락을 해야 했다. 아내가 차려 주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계량기를 녹일 요량으로 물을 데워 달라고 했다. 물을 그릇에 담아 들고 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갑자기 어디에 있는 계량기를 싸놓았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슨 말이야! 계단 위에 있는 우리 것을 쌌지!"

하면서 아내가 나를 못미더워 하는 것 같아 못마땅해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래 것이 우리건대'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위에 있는 것이 우리 거지 아래 있는 것이 왜 우리 건가?"

그러자 아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리소에 전화를 하여 물어 보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아내의 말대로 아래 것이 우리 거였다. 얼어붙어 팍 터져 버리라고 욕을 퍼부은 아래 것이 우리 집 계량기였다. 고생을 하며 싸 놓은 계량기는 우리 것이 아니라 윗집 것이었다. 아파트의 제일 갓 집은 계량기가 바로 집 옆에 붙어 있지 않고 아파트 층과 층 사이의 벽에 설치되어 있다 보니 계단 위에 있는 것을 우리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계량기에 보온장치를 한답시고 남의 집 계량기를 싸놓고는 멀쩡한 사람에게 정신나갔다고 욕을 퍼부었으니 나도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계량기 덕분에 좋은 일 한 번 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언제 또다시 남의 집 계량기를 그렇게 정성 들여 싸 놓을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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