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소 논설위원

대학 대신 내 인생을 살까?

지금은 흔하게 쓰이는 아카데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나온 말이다. 그 본래 뜻은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는 곳을 의미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아카데미아를 세워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다. 아카데미아의 목표는 유능한 인재 즉 철학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효시다.

12세기 무렵 유럽의 도시는 상업화되면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가르칠 대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세워진 대학이 바로 ‘우니베르시타스’라는 종합대학이다. 이어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근대에 들어 산업혁명을 겪으며 각국은 적극적으로 대학을 설립하게 되는데, 바로 베를린 대학, 베이징 대학, 도쿄 대학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관리 양성의 목적으로 국가가 나서 대학을 만든 사례다.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조선의 성균관 등이 모두 오늘날의 대학이다. 근대적 대학의 시작은 1906년 세워진 숭실학교를 시작으로 세브란스,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이 세워졌고, 1946년에는 조성총독부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학의 역할은 학문 연구뿐 만아니라 다양한 직업 교육과 평생교육이라는 과제를 안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 진학을 할 정도니 과거 대학 문턱이 높던 시절에 비하면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최근 들어서는 동남아시사 유학생들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 대학을 꼭 가야되는가? 라는 사회적 고민도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10년 3월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김예슬 양이 손 글씨로 눌러쓴 대자보를 대학 담벼락에 붙이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그의 대담한(?) 자퇴 선언은 사회적 이슈가 됐다.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 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 그 후 그 학생의 결정이 옳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양분화된 의견만 난무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 고위 공무원의 출신 학교별 비율은 보면 서울대, 연대, 고대 등 3개 대학 출신 약 47%를 차지한다. 소위 SKY 출신들이 우리나라 관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비리그 8개 대학 출신이 42%. 기타 대학 출신이 58%를 차지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기형적인 모습이다.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서 소위 출세하려면 어떤 대학을 가야하는지를 자명함을 드려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학벌과 인맥이 좌우하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시에 이어 정시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부모들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합격이 결정된 부모들 또한 등록금 마련에 동분서주한다. 뭐하나 쉬운 게 없다. 국가장학금 신청에, 등록금 대출에 컴퓨터에 앉아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연 대학은 꼭 가야하는 것인가?

학력이 곧 세상을 사는 힘이 되는 사회에서 대학 진학은 내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문교부라고 칭하던 부처가 교육인적자원부가 됐다. 교육이 자원이 되는 사회가 되었으니 꼭 대학에 진학해야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자원이 없는 나라가 세계 경제 10권 안에 들었다는 사실은 교육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반면 2009년의 경우 81.9%인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에 비해, 독일의 경우는 40%에 밑돈다. 바로 직업 교육에 중점을 둔 연유다. 4년제 위주의 대학보다 직업 교육에 중점을 둔 전문대학의 비율을 높이자는 의견에 무게 중심이 실리는 근거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번듯한 대학 대신 내 인생을 사는 모험을 해볼까? 아니면 안전하게 사회의 대세에 편승해 살까? 결단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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