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순 우리정신과 원장

환자 L씨는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기운도 하나 없는 듯 맥 빠진 모습으로 내원하였다. 이런 저런 것을 질문하여도 아무 것에도 흥미가 없는 듯 말이 없다.

보호자에게 상황을 물으니 어느 날부터인가 부인에게 말을 않고 눈도 맞추지 않더니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갈수록 식사도 하지 않아 걱정이 되어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병실에서도 L씨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였다. 겨우겨우 수액을 맞게 하며 ‘식사를 하셔야 한다’, ‘약을 드셔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처음에는 단호하였지만 식사도 조금 씩 하고 약을 드시면서 잠을 주무시고 조금씩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 무척 서운한 것이 있었냐고 묻자 환자 L씨는 주루룩 눈물을 떨어뜨렸다.

L씨는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퇴직하기 전까지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며 가족들을 봉양하였다. 직장 다니며 한 번도 쉬어 보지 못하고 퇴직을 하니 몇 개월은 날듯이 좋았다. 아침에 늦잠을 자도 되고 내가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고 너무나 황홀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자 그 재미있고 황홀했던 것들이 별 재미를 모르겠고 늦잠을 자도 아무 전율도 오지 않았다. 온 종일 집에 있는 것이 따분하게 느껴지고 왠지 부인의 눈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혼잣말로 “그렇게 뒹굴지만 말고 아파트 경비라도 하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심장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퇴직하고 불가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동안 성실하게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직장을 다녔건만 부인의 냉담한 반응에 남자의 자존감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부인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고 얼굴도 굳어졌다. 자식들을 보아도 이제는 말이 나오지 않고 안면 근육이 굳어져 갔다.

가족 면담을 통해 L씨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부인과 자녀들은 그 동안 직장 다니며 열심히 일해 오신 L씨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며 용서를 빌었다. L씨 때문에 가족들이 편안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되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지금까지 L씨가 열심히 일해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L씨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멘트를 아끼지 않고 표현하며 L씨를 지지하였다. 그때 L씨는 빙긋 웃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들이 진심으로 사과하며 L씨의 마음을 알아주니 L씨의 분노가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쩜 남자들에게 너무 많은 의무와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다.

그 짐이 무거워 우울해 지기도 하고 알코올 중독이 될 수도 있겠다.

남자들의 짐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내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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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구 고잔동 70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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