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차 기사 이재승 씨

가슴이 아팠다. 인터뷰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익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삶의 어려움’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내가 겪은 아픔은 아픔도 아니었음을, 나의 고통은 진짜 고통과는 거리가 먼, 한낱 하찮은 투정이었음을 절실히 반성했다. 그만큼 그는 힘들었다.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그런 그가 남들을 위해 봉사를 해왔고,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다시 그 사람을 추천했다. “천사로 소개해 달라”고.

단원구 원곡동 유통 상가 주차장 안에 세워 둔 2.5톤 화물 탑차 안에서 인터뷰는 이뤄졌다. 화물차 운전기사 이재승 씨를 만났다.

그는 2007년 경기도지사로부터 표창을 받은 봉사자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백혈병을 앓는 한 아이의 아빠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백혈병 중의 하나인 ‘재생불량성악성빈혈’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게 된 아들은 이제 ‘생존’은 물론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사회복지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다. 당시 함께 치료를 받던 아이들은 대부분 하늘나라로 간 안타까운 상황에서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아이는 이제 청년이 되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이재승 씨의 또 한 명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해 어린 몸에도 불구하고 9번의 전신마취와 수술을 감당해야 했다. 불치병을 앓는 아들 하나만으로도 견뎌 내기 어려운 아픔일터인데, 둘째 아이까지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됐다니, 그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 ‘웃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그만큼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숙연해진다.

“제가 사람 복이 많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불행했지만 그 과정만큼은 행복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제 머릿속에 모두 기억되고 있습니다.”라며 그 동안에 고마웠던 분들을 일일이 열거한다. 대부분 성당의 수녀님들이 많지만, 특이하게도 군부대의 주임원사 얘기도 나오고, 무엇보다 반월신문의 기자도 그 안에 포함된다며 신문사와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한다. “처음 아이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시의원에게 사정을 했고 그 시의원께서 언론사에 연락을 했나 봐요. 그런데 제일 먼저 달려와서 신문에 소개해주고 그로 인해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준 분이 반월신문 기자였습니다. 이름은 기억못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서울 출신으로 1979년 성가병원에 입사해 원무과에서 근무하던 이재승 씨는 당시 만난 대부와 수녀님들을 통해 종교를 알게 되고 이후 세례를 받았다. 93년 안산에 내려온 그가 아이의 병을 알게 된 건 97년. 이후 삶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졌고, 그만큼 또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봉사밖에 없었다.

사동에 위치한 명휘원에서 매주 목욕봉사를 시작했고, 본오복지관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한 번 시작한 봉사는 안산시노인요양원으로 고대병원으로 대부도에 있는 어린양의 집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직접적인 봉사가 어려울 경우에는 자그마한 후원이라도 계속했다.

아이가 아픈 후 시작한 황태와 김 장사를 하며 본오복지관을 포함해 서울, 대전, 양주 등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에 물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재승 씨의 부인은 지금도 새벽이면 신문배달을 위해 집을 나선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큰 아들과 장애를 가진 작은 아들까지...두 부부는 비록 힘들지만 꿋꿋하다. 웃음도 잃지 않는다. 이들의 아름다운 삶이 지치지 않고 계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 강희택 기자 kkang@banw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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