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3.1독립운동

안산문화원 사무국장/향토사학자 이 현 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잔학한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주권강탈과 경제착취 외에도 우리말 사용금지, 일본식 이름 바꾸기, 결사 및 토론의 자유 제한 등 정치적 자유를 말살하고 우리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이 심해질수록 우리민족의 반일감정과 저항을 뜨겁게 달아올라 마침내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기화로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퍼져 나갔는데 우리고장 안산에서도 1919년 3월 30일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몇몇의 독립운동가를 살펴보면 우선 비립동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순칠(洪淳七 : 1878~1932), 유익수(柳益秀 : 1870~1926)선생과 1919년 3월 31일 대부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원표(洪元杓 : 1875~1962)선생이 있으며 실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항일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안산의 샘골마을에서 한글과 민족정신을 교육하여 정신적 독립운동을 한 최용신(崔容信 : 1909~1935)선생을 들 수 있다. 홍순칠선생과 유익수선생은 윤병소, 이봉문, 김병권, 윤동욱. 강경식, 등과 함께 당시 수암면, 군자면, 반월면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선봉에 서서 당시 2천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된 이들은 그 해 경성복심법원에서 홍순칠선생이 징역 6월, 유익수선생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출소 후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홍원표선생은 김운규, 노병상 등과 함께 대부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역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웃 시 군에는 거의 다 있는 삼일독립운동 공원이 안산에는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대부동사무소 앞에 조그만 삼일독립운동기념비가 있는 것 외에는 삼일운동기념탑 조차도 안산에는 없다. 수년전부터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안산의 삼일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공원과 기념탑 건립을 추진한 적이 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8주년 삼일절을 맞이하며 선열들의 애국 애족정신을 받들어 안산시에 삼일독립공원과 기념탑이 건립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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